
무제
문마리아 님
*삼국지 위서 중 194년 기록 기반.
흥평 원년 연주兗州.
중심부대가 자리를 비운 성은 적막했다.
회백색이 어롱진 투박한 돌틈 사이로 짙은 낯빛이 슬쩍 밖을 내다보았다. 성벽 아래부터 저 너머 평야를 주욱 둘러본 사내는 조용히 돌틈 새로 머리를 들였다. 살빛이 짙은 사내의 입성은 병졸의 것이었다. 안쪽 바닥으로 발을 내린 사내는 뒷걸음을 쳐 삼 보 정도 뒤에 서 있던 문관에게 길을 내어주었다.
“위협이 될 동태는 없습니다. 오르시지요. 순 군사軍師님.”
순욱은 장포 자락을 모아 쥐고 병졸이 인도하는 대로 돌층계 위로 발을 딛었다. 뒤따르는 호위가 찬 장검이 이따금 석벽에 스쳐 쇳소리를 울렸다. 층계를 따라 성루에 오르자 여밈을 떨친 학창의 자락이 휘감아도는 바람에 넓게 나부꼈다.
성루 아래로 펼쳐진 시야는 불안하리만큼 조용했다. 군이 떠난 지 이미 오래였다. 주군을 따라 성을 떠난 군사들은 달이 스러지고, 다시 차오르기를 반복해도 돌아오지 않았다.
“군의 위치는 어디쯤이라던가.”
“동해군 부근까지 진군하였다 합니다. “
“동해군… “
주군은 얼마 전 다시금 서주 땅으로 말머리를 향한 지 오래였다.
한 번 군사를 일으켜 서주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도 주군은 노를 풀지 못했다.
화근은 서주 자사 도겸의 서신이었다. 서신을 읽어가던 중반부터 떨기 시작하던 손은 서신의 말미에서 기어코 참작을 호소하고 있었을 글월을 땅에 팽개치고야 말았다. 진노한 주군은 핏줄이 툭툭 불거지기 시작한 주먹으로 서탁을 내려치며 분노를 토해냈다.
“참으로 무도하고 발칙한 자 아닌가. 내 아버질 죽여놓고 감히 내게 백성을 내세워가며 용서를 구한단 말이냐. 제 백성 안위는 돌아보면서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자식은 생각지도 않는게로구나. 내 이자를 가만 두지 않을 것이야.
이 원수를 갚지 않는다면 내 아버지께서 어찌 저승에서 편히 눈을 감으실 수 있단 말인가?”
아비를 죽인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노라며 노성을 토해내던 주군은 그날로 전군에 령을 내렸다. 반의를 내비치는 자는 군공과 지위를 막론하고 부친을 잃은 주군의 분노를 정통으로 맞아야 했다. 연주 땅에 조曹의 붉은 깃발이 휘날리는 데 가장 공을 세웠던 진궁조차도 면전에서 아비의 한을 들어 일갈하는 주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 순욱 또한 정세가 불안하고 희생이 크니 부디 뜻을 잠시만이라도 거두시라 청하기를 채 마치기도 전 분기탱천한 호령을 듣고 물러나와야 했었다. 달이 바뀌기 전 주군은 군사를 이끌고 서주로 말머리를 향하고야 말았다.
분노에 찬 제후의 원정은 성급하고 난폭했다.
조조의 군대는 차례차례 땅을 밟을 때마다 피를 불렀다. 군이 머무르는 곳마다 불길이 치솟았고, 비명소리가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군이 지난 곳에는 불에 사그라든 대지 위에 타죽고 맞아죽은 시신들만이 곳곳에 널리고 쌓여 시신더미가 물길을 막는다는 얘기까지 돌았다.
서간 위로 참상을 접하는 밤마다 순욱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밤이 늦도록 이유없는 불안감과 이명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눈꺼풀 아래로 창검에 베여 피를 뿌리며 죽어가는 인영과 발길질에 채여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것의 곡소리가 선했다. 수 년 전 피난길에 수도 없이 목격했던 참상이 귀에 메아리쳤다. 백성들은 지금도 참혹히 죽어나가고 있을 것이었다. 천하를 바꾸겠노라 장담하던 자의 손에.
부디 죄없는 백성에게 노여움을 풀지 마시라, 백성에게서 칼끝을 거두시라 간곡한 서신을 보낸 것이 벌써 여러 번.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바싹 말라붙어버린 입술에서 한숨이 깊게 새어나왔다. 말없이 저 멀리를 바라보다 눈을 올리자 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찼다. 솔개 한 마리가 잿빛 날개를 확 펴고 저만치에서 시야를 맴돌고 있었다.
짐승은 제법 컸다. 거칠고 짙은 깃과 날카로운 날갯짓이 유독 도드라져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날서고 깊은, 도무지 생각을 종잡기 힘든 눈초리와 짙고 내려앉은 색의 장포. 취기가 오른 중에도 사람을 꿰뚫어보는 듯한 눈매와 비수를 품은 저음.
- 기재인 줄 알았더니 아직도 서간 앞을 크게 벗어나진 못했구려. 문약.
조 사군이 그렇게 포부가 정연한 위인으로 보이시오?
저 동탁이 낙양에서 칼을 휘두를 때도 꿈쩍 않던 사군이외다. 부모를 잃은 분이 크다 하나 그 하나만으로 저 서주 땅을 온통 헤집어 분풀이를 할 만큼 제 수신을 못할 사람 같소이까?
- 무슨 의중이신지 소생은..
- 필경 후회할게요.
- …..
- 내, 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나는 경고해 드렸소.
조조가 두 번째로 출병을 명하기 전날 밤, 진궁은 분명 그리 말했었다. 마지막에 흘린 헛웃음은 무슨 의미였을까.
순욱은 한참을 솔개가 멀어져간 곳을 응시하다 천천히 몸을 돌려 성루에서 내려왔다.
장막張邈이 보낸 사람이 도착한 것은 다음날이었다.
“여포? 여포가 말이요?”
주인 없는 접견장에 들어선 사내가 가져온 소식은 긴장한 벌집을 찌르기에 충분했다.
장내는 곧 술렁이는 소리들로 가득했다.
“여 장군은 조 사군을 도우러 왔으니 속히 군사와 식량을 제공해주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유이라 이름한 사내는 저를 반기지 않은 좌중의 분위기에 답을 받아야겠다는 듯 마른 목줄기를 가다듬으며 제법 울리는 목소리를 높였다.
“여포가 대관절 무슨 일로 예까지 와서 사군을 돕겠다 자청한단 말이외까?”
“원소袁紹가 언제 군을 움직일 지 모르는 정황입니다. 이에 여 장군이 장 대인의 기별을 받고 뜻을 비쳐오신 것인데 공들께서는 어찌 그런 의심을 보이신단 말입니까?”
“여포가 어떤 자인지 알면서 그리 권하는 거요? 주인을 세 번이나 버린 자인데 그걸 그저 믿으라는 말인가!”
유이가 돌아간 직후 소집된 군의軍議는 무거웠다. 벼락같은 소식의 여파는 입을 쉬이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순욱은 술렁이는 분위기와 결단을 묻는 듯한 시선 속에 무겁게 입을 열었다.
“...속히 하후 장군과 이 장군께 사람을 보내고 주군께 파발을 보내 속히 귀환하시라 전하십시오. 장막이 반기를 들었습니다. ”
“순 공, 그 말은…”
“장막은 계략을 꾸미기에는 겁이 많고 치밀하지 못한 위인입니다. 필경 장막에게 계책을 준 공범이 있겠지요. 진 군사가...진궁이 장막과 짜고 여포를 불러들여 주군께 칼을 빼어든겝니다. “
찬물을 맞았던 회탁은 곧 어지럽게 술렁였다.
“진 군사가 합세했다면 연주 전체가 사군께 등을 돌릴수도 있는 노릇 아닙니까! 속히 사람을..”
“이미 손을 다 써 두었을 게 뻔하지 않소. 그렇게 안이할 위인이 아니외다. “
“..이미 늦었을 겁니다. “
무거운 예상은 속속히 맞아들었다.
유이가 견에 도착했던 그날 연주성은 이미 여포의 손에 떨어졌고, 복양성이 여포에게 열렸을 때는 날이 바뀌어 있었다.
하후돈夏候惇이 그날중으로 도착한 것은 다행이었다. 붉은 뺨에 어룽진 자욱을 달고 온 하후돈은 순욱과 정욱을 마주했을 때 인정 많은 무장은 숫제 울기 일보 직전이었다. 투박한 입술을 짓씹던 하후돈은 이전李典이 도착해 여포가 진궁의 서신을 전해오며 성문을 열어줄 것을 요청했음을 알리며 통분을 터뜨리자 끝내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다.
“어떻게 진궁 그자가 그럴수 있단말이오. 어떻게…”
“장군께서는 부디 진정하십시오. 이리 장군들께서 와주시니 마음이 한결 놓입니다.“
통분을 감추지 못하는 방에서 조용히 내실로 빠져나온 순욱은 따라들어온 정욱의 손을 마주 잡았다.
“정 공, 외람되오나 지금 곧장 이전 장군과 함께 범, 동아로 가주실 수 있겠습니까.
군이 깊숙히 진군했었으니 빨라야 사흘, 아니, 이레까지도 걸릴 것입니다.
동아현은 정 공의 고향이 아닙니까. 주공이 귀환하실 때까지 범과 동아를 보전해주실 분은 오직 정 공뿐이십니다. “
정욱의 크고 마른 손을 부여잡은 순욱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정욱은 순욱보다 스물 둘이 위로, 이미 몇 해 뒤면 환갑을 바라볼 나이였다. 그런 그더러 당장 여포의 말발굽이 어디까지 짓밟을지 모르는 성벽조차 갖추지 못했을 고을로 떠나달라, 그리 청해야 했다.
“참으로 죄송합니다..”
“아니외다. 순 공의 말대로 이것은 마땅히 이 정중덕仲德이 맡아야 할 소임이요. 날이 밝는대로 떠나겠소이다. 부디 뒷일을 부탁하오. “
정욱은 결연히 응수하는 젊은 동료를 온기어린 눈으로 바라보다 고개를 한번 주억하고 방을 나섰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자 순욱은 빠르게 서탁에 펼쳐놓은 지도에 나타나 있는 요충지들을 눈으로 훑었다. 길어야 이틀이었다. 사흘 내로 여포군의 말발굽이 성의 코앞까지 들이닥칠 터였다.
전란에 불안해하던 성을 또 한번 뒤집어 놓은 것은 예주 자사 곽공이 보내온 전령이었다.
곽공은 수만의 병사를 데리고 와 성 근방에 진영을 갖추었다. 곽공의 등장은 성 내를 더욱 시끌하게 만들었다. 곽공의 군대가 여포와 내통하여 성을 치려 한다는, 근원지를 알 수 없는 소문은 이미 성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순욱은 서신을 반듯이 내려놓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곽 자사께서 저와 성 밖에서 독대를 원한다 하시는군요. “
“적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판국에 독대를, 그것도 성을 나와 얘기를 하자니. 요구가 좀 과하지 않습니까?”
“정말로 곽공이 그들과 손을 잡았다면 어떤 속내를 감추고 있을지 모르는 노릇입니다. “
“너무 위험하오. 거절하는 편이 좋지 않겠소이까?”
“염려에 감사하오나 제가 나가야 오히려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여포와 장막을 눈치챈 것이 채 사흘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리 속히 대군을 움직인 것을 보면 사전에 결탁한 것이 아닐 여지도 있으며, 설사 미리 언질을 받았더라도 곽공의 행동을 보면 필시 완전한 계략을 가지고 움직인 것은 아닐 터입니다.
허니 곽공이 아직 마음을 굳히지 않았을 때에 그들을 설득하면 뜻을 돌리지는 못해도 우리가 공격받을 시에 나서지 않게 할 수 있겠으나, 우리가 먼저 그들을 의심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건 그들을 노하게 해 우리를 칠 계략을 내게 하는 격밖에 되지 않습니다.
허니, 제가 그를 만나보고자 합니다.
예주 자사 곽공은 견성으로 향하면서부터 긴장하고 있었다. 진궁이 비밀리에 보낸 사람을 만나 서신을 전달받은 순간부터, 그는 도박을 하고 있었다. 진궁과 장막을 도와 여포를 친다. 성공한다면 조조의 세력을 누를 수 있을 뿐 아니라 연주에 대한 영향력 또한 가질 수 있을 것이나, 여포라는 예상키 어려운 적을 곁에 두고 사는 격이 된다. 허나 일이 끝내 실패로 돌아간다면, 그는 현재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진 제후와 칼끝을 마주하게 될 것이었다.
그가 판단하기에, 조조의 세력은 쉽사리 무너질 것이 아니었다. 허나 진궁이 조조를 배반했다면, 승산은 있었다. 지금 조조가 움켜쥔 연주 땅의 상당수는 진궁이 그의 손에 바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반군에 힘을 보태준다면, 그도 몫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어느 정도 개입하고 빠질 것인지, 기회를 움켜쥘 것인지. 열쇠는 그가 향한 견성에 있었다.
진중으로 찾아온 순욱은 익히 들어온 풍문에 꼭 걸맞는 인물이었다. 관옥같은 풍채에 총기어린 눈매를 가진 순荀씨의 손은 과연 왕좌지재라 불렸을 만한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 조조도, 진궁도 없는 지금 조조군의 책임자는 그였다. 제후의 부재 상태에서 일어난 반란. 당장 적이 내일이라도 들이닥칠 지 모르고, 목전의 상대가 적인지 아군인지조차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에게 지워진 부담감은 실로 막중할 터였다. 곽공은 정중히 읍하는 순욱의 낯빛을 면밀히 살폈다.
예상외로, 순욱은 침착하고 당당했다. 적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내비치지 않은 채, 호위 한 사람만 대동하고 진영 한가운데로 나아온 그는 정중히 곽공의 제안을 거절했다. 곧 여포의 본군이 이 성을 맹공해올것이라, 조 사군을 그저 기다릴 셈이냐는 위협에도 순욱의 대합은 한결같았다.
-승리의 운은 하늘에 달린 것이요, 우리 군은 그저 끝까지 맞서 싸울 뿐입니다.
검고 깊은 눈에서는 한치의 흔들림도, 두려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순욱을 따른 견성의 장수와 병졸들의 눈 또한 마찬가지일 터였다 .견성은 본디 수성의 목적으로 건축한 성이었다. 만약 곽공이 군사들에게 총공격의 령을 내린다 해도, 굳건한 문은 쉬이 열리지 않을 터였다.
곽공은 결국 전군에 회군을 명하고 견성을 뒤로 했다..
여포의 본군이 견성의 전면을 에워싼 것은 곽공이 떠난 다음 날의 일이었다. 보고를 받은 순욱은 방패를 든 장수의 비호를 받아 성멱 위로 올랐다. 지난 날 둘러보았던 평야에 창검을 든 군사들이 대형을 갖추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성을 집어삼킬 듯 우레같은 소리를 지르는 여포군의 중앙에서, 순욱은 검은 전포를 두르고 붉은 말 위에서 위용을 뿜어내는 장수를 찾을 수 있었다.
-천하의 말 중에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에는 여포가 있다.
동탁이 그를 얻기 위해 내주었다는 명마, 적토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성루 쪽을 똑바로 노려보는 여포는 그야말로 온몸으로 세간의 말을 증명했다. 날카롭게 휘어진 눈매에서는 형형한 안광이 번뜩였고, 억센 목과 굵은 팔뚝은 쇳덩이라도 져낼 수 있을 듯 위협적이었다. 맹수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손아귀에 쥐어진 방천화극에서는 채 닦지 않은 희생자의 피가 검게 말라붙어가고 있었다. 힘줄이 곧게 선 목에서 우레같은 목소리가 성벽 위까지 울릴 때마다 성벽에 시립해 있던 병사들 중 몇몇은 그 위세에 눌려 슬슬 뒤로 발을 빼고 저도 모르게 머리를 움츠렸다.
“장군께서는 어이하여 이 견성까지 걸음하셨습니까?”
“장 태수의 편지를 받지 못하였소? 나는 조 공을 도우러 왔소. 어찌하여 돕겠다 하는 나를 대적하려 드는가?”
“어찌하여 장군께서는 사특한 꾀로 남을 속이려 드십니까?”
“지금 뭐라 했나?”
순욱은 눈을 한 번 깜빡였다가 여포의 눈을 바로 응시했다. 성벽의 높이를 사이에 두고 두 쌍의 눈이 기세 싸움이라도 하듯 서로의 시선을 얽었다.
“장 태수가 진궁과 꾀하여 장군을 불러들인 줄을 저희가 모를 줄 아셨단 말입니까?
장군께선 주인이 잠시 비운 틈을 타 불의한 일을 행하려 하시니 이는 매우 패악하고 무도합니다.
능히 꿰뚫어보이는 교란에 넘어갈 만큼 이 성중이 어리석지도 않고, 쉬이 성문을 열 일도 없으니 얕은 꾀는 그만두시지요.”
“네놈 - !”
“무슨 의도로 예까지 군을 움직이셨는지는 자명해 보입니다만, 이 성을 내드릴 일은 없을 것입니다. “
“서주에 있는 조조를 믿는 모양인데, 예서 서주까지는 말을 달려도 사흘길. 그때까지 버틸 자신이라도 있단 건가?”
“그저 마지막까지 싸울 따름입니다. 순순히 적에게 성을 내어 줄 자는 이 성에 없으니, 장군은 부디 현명히 행동하십시오. ”
성벽을 사이에 둔 담판이 끝나기 무섭게 살들이 성벽을 노리고 쏟아졌다. 비호를 받아 성루를 돌아 내려오는 도중 한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걸음이 비틀렸다. 순욱은 붙잡는 무관에게 손을 들어 괜찮다 표시하고는 다리에 힘을 주어 마저 층계를 내려왔다. 두려움을 느낀 것은 순욱 또한 매한가지였다. 검붉은 눈을 마주한 순간 몸이 뻣뻣이 굳어 못을 친 듯했던 느낌이 지금도 팔 다리의 힘줄에 선했다.
인중 여포라는 말이 진정 허언이 아니로군.
읊조리듯 나온 탄식은 잔뜩 잠겨 있었다.
여포군의 공격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날이 바뀌어도 작정하고 에워싼 포위망은 쉬이 누그러지지 않았고, 성의 방비도 쉬이 허물어지지 않았다. 여포의 기세에 눌릴 듯하여 목소리를 높였기는 하나, 순욱 또한 허언을 한 것은 아니었다. 견성은 본디 수성(守城)의 목적으로 건축한 터, 견고하고 굳건하기로는 연주에서 첫손에 꼽히는 성이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연주와 복양은 이미 진궁의 손에 떨어졌음이요, 정욱과 이전이 지키는 범과 동아는 일개 고을에 지나지 않았다. 복양성이 여포와 진궁이 손에 있는 터, 복양에서 계속 범과 동아를 공격한다면 당해내기가 어려울 터였다. 견성 또한 고립될 경우 손을 쓰기 어려운 것은 매한가지였다. 며칠 후 조인이 지원군을 이끌고 성에 당도하고, 범과 동아에 원군이 도착했다는 기별이 도착하고 나서야 순욱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전령이 도착하자마자 연주로 즉시 군을 돌린 조조는 도중에 조인, 하후연 등에게 군사를 주어 격전지로 보내고 난 후 나머지 주력군으로 복양성을 공격했다. 적의 두 배가 넘는 압도적인 전력에도 불구하고, 첫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싸움은 꼬리를 물며 길어졌다. 전면전이 실패했다는 비보를 받은 다음 날, 순욱은 일찍 군중을 나와 별채에 단을 차렸다.
정갈히 씻어낸 몸 위로 갓 지은 백의를 여민 채 간소히 차린 단 앞에 초를 피우고 머리를 조아렸다. 평소 이러한 기원에 큰 의미를 갖지는 않던 그였으나, 배拜 하나 하나에 마음을 다해 군의 무운을, 백성의 안녕을 빌었다.
난세가 이미 수 년. 황룡은 그 힘을 잃었고, 백성은 크고 작은 도적에게 시달리고 짓밟혀 죽어갔다. 칼에 맞아 피를 흘리던 사내와 짓밟혀 울던 어린아이가 눈 앞에 아른거렸다.
부디 이것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 부디 마침내 이 일을 마쳐 천하가, 이 한(漢)이 만세에 평탄히 서게 하소서-
초가 꺼진 것은 그때였다. 갑작스레 불어온 바람에 팔을 들어 막으며 움츠렸던 순욱은 불이 꺼진 것을 발견하고 조심스레 불그릇에서 불씨를 휘저어 다시금 불을 초에 옮겼다. 그러나 상을 정돈하고 다시금 상 앞에 엎드려 기도를 올릴 때, 또다시 바람이 불어 촛불이 꺼지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람 없이 적막했건만. 갑작스레 바람이 거듭 불어온 영문을 알 도리는 없었으나, 순욱은 다시 불씨를 휘저었다. 그러나 세 번째 초 또한 바람을 피하지 못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문득 손에 잡은 게 왜 향이었는지, 왜 거기 불을 붙였는지 순욱 본인도 알 수 없었다. 허나 만약, 혹시 저의 생각이 맞는다면...
향 끝에 불을 옮기고 빈 촛대 안에 꽂자 흰 연기가 춤을 추듯 흔들리며 피어오르다 이내 선을 그렸다. 바람은 불지 않았다. 순욱이 기도를 끝내고 향을 거둘 때까지도, 주변은 고요했다.
촛불은 꺼뜨려지나 향은 피어오른다. 이는 무슨 뜻입니까. 신명이시여.
영문모를 기이함이 뼛속을 파고들었다. 깊은 속에서부터 냉기를 내며 똬리를 트는 불안함의 연유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순 군사님!”
저를 찾는 소리에서야 순욱은 속을 잠식하는 듯한 불안함에서 정신을 차리고 가다듬을 수 있었다.
“복양에서 봉화가 올랐습니다!”
“수비의 책임자에게 경계를 강화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 전하게. 오늘에 승패가 달렸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네.”
순욱은 장포를 걸쳐 여미고 부장을 따라 문을 나섰다.
차게 식은 밤 공기로 연기가 어지럽게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