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산, 계산, 그리고 오산
제피 님
"내기 바둑?"
순욱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생각하기 힘든 단어에 곽가는 고개를 들었다. 곽가와 달리 즐기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휴식 겸 두뇌 자극 겸 반상(盤上) 앞에 앉는 일은 확실히 순욱에게도 있다. 하지만, '내기'라니.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드문 일도 다 있다며 눈이 동그래진 것도 잠시. 곽가의 시선은 다시 아래쪽, 조금 전까지 응시하던 눈앞의 한 점으로 돌아갔다.
"순욱 공의 제의, 기쁘게 받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선약이 있어서 말이야. 저녁 즈음이나 내일로 해 줄 수 있다면……."
선약이란 물론 눈앞의 고풍스러운 술병을 가리킨다. 순욱의 제의는 확실히 흥미로운 사건이지만, 지난 전승의 포상으로 조조에게 하사받은 눈앞의 술은 곽가의 취향에 너무나도 잘 맞았다. 상당한 독주(毒酒)이기도 한 병의 내용물은 이미 절반을 지나 삼 분의 일이 남았을까 어떨까 하는 시점. 덤으로 이것이 오늘의 첫 병인 것도 아니다. 이 상황에서 순욱을 상대로 내기바둑이라니 아무래도―. 아쉬운 듯 내용물이 얼마 남지 않은 병을 바라보며 곽가가 연기를 제안하려는 순간.
"그건 안 되겠군요."
부드럽지만 단호한 거절이 한발 먼저 말을 끊었다. 곽가가 재차 고개를 들자, 순욱은 차분하지만 묘하게 단호한 어조로 사정 설명을 시작했다.
"아래쪽의 일 처리가 지연된 탓에 예정에 없던 여유시간이 생겼을 뿐이라서요. 유감스럽지만 잠시 후에는 다시 집무실로 돌아가야 할 것 같군요."
상서령부는 다망하다. 전승으로 점령지가 확대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지금은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묘한 위화감에 곽가가 무심코 고개를 갸웃하려는 순간, 순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
"동반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동반? 생각지 못한 단어에 곽가가 실제로 고개를 갸웃하자 순욱이 눈만으로 살짝 웃었다. 그 시선은 곽가가 말한 '선약' ― 즉 술병이다 ― 을 향하고 있었다.
"적당한 술은 두뇌를 활성화시키는 좋은 약이라는 게 곽가 공의 입버릇이었으니까요."
아니면 당장 승부를 피해야만 하는 중요한 이유라도 있으신 걸까요. 이어지는 말과 함께 입꼬리가 한발 늦게 미소를 그렸다. 완만한 손놀림으로 술병을 찰랑찰랑 흔들던 곽가의 손이 뚝 하고 멎었다.
"그러고 보니……."
딱.
"무엇일까요."
딱.
어느덧 반상 위에는 흐릿하나마 세력의 형태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곽가가 흑, 순욱이 백. 내기라고 한 이상 물론 맞바둑이다. 그러고 보면 순욱과 호선(互先)으로 두는 것도 오랜만인가. 곽가는 느긋한 손놀림으로 돌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내기라고 한 이상은 원하는 게 있다는 거겠지.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의 요청 한 가지 들어주기― 라고는 했지만, 그렇다면 순욱 공이 이겼을 때는 뭘 받아내고 싶었던 걸까, 하는 게 문득 궁금해져서 말이야."
딱.
곽가의 물음에 순욱은 바둑돌이 아닌 그 옆의 잔으로 손을 옮겼다. 물론, 내용물은 동반 허용 선언에 사양 없이 얼마 남지 않은 병의 내용물을 따른 곽가와는 달리 평범한 차다. 이내 우아한 손놀림으로 찻잔을 다시 내려놓은 순욱은 옅게 웃었다.
"호선에서 제 승리를 염두에 두시다니, 과연 곽가 공. 신중하시군요."
곽가는 애매하게 웃었다. 그야 순욱의 말도 지당한 것이다.
근 수년간 순욱이 곽가를 맞바둑에서 이긴 적은 없다. 최근 몇 달간은 애초에 거의 접바둑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순욱에게 있어 바둑이란 그저 머리를 사용하는 유희의 한 가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조조나 곽가처럼 반상 위에 군략을 겹치며 열띤 토론을 나누는 일도, 두는 이상엔 이겨야만 한다는 승부에 대한 집착도 없다. 기왕 시간을 쓰는 김에 두뇌를 깨우는 효용을 덤으로 얻을 수 있으면 그저 그걸로 족하다. 그렇기 때문에 곽가 역시 순욱과 두면서 크게 승패를 신경 쓴 일은 그리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군요. 만약 제가 이긴다면 그건 즉 곽가 공의 지론이 잘못이었다는 것이니……."
그 말씀에 다소 책임을 져 주시도록 하는 건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담담한 얼굴로 이어진 말에 곽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문제는 간단했다.
평소 곽가의 분야는 내정이 아닌 군사 쪽. 전장에서 병사의 숫자로 줄타기를 하거나 하는 경우가 아닌 한 업무적으로 세세한 숫자놀이를 해야 할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곽가는 만취한 상태에서 세밀함과 정확성을 요구하는 계산작업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술을 마시고 바둑을 둔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둑에는 분명 정밀한 계산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도 아니다. 단지 그 정밀함이 바둑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것은, 취했을 때 반상의 맞은편에 앉는 사람이 높은 확률로 조조였기 때문이었다.
'조조님과 두면서 취중이라고 딱히 승률이 떨어졌던 기억은 없으니까 그만 평소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해 버렸지만, 생각해 보면 내가 취했을 때는 당연히 상대도 취한 상태니까. 대국의 내용이 어떻건 결과적으로는 여느 때와 비슷한 승률이 나오는 게 당연하지.'
자신답지 않은 엉뚱한 오산이다. 곽가는 짧게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아직 반상의 상태는 초반에 지나지 않는다. 형세가 진행되면서 서서히 술이 깨거나, 혹은 본격적인 근접 박투로 단계가 넘어가기 전에 과거의 승부들처럼 불계(不計)를 얻어낼 수 있다면…….
어느 쪽이든, 승기를 붙잡기 위해서는 이 이상으로 취하는 건 논외다. 곽가는 아직 얼마간 내용물이 남은 술잔을 옆으로 밀어냈다.
당분간 무언인 채 수가 진행되다, 문득 곽가의 손이 멈췄다.
전체적인 형세는 확실히 흑이 우세하다. 하지만……. 곽가는 손가락으로 미간을 살짝 눌렀다. 과거 호선으로 진행됐던 일국들을 돌이켜 보면, 이 정도 수순이 진행되었으면 좀 더 확실하게 차가 나 있어야 한다.
결론은 둘 중의 하나다. 술이 깨는 속도가 예상보다 느리거나, 혹은 애당초 생각한 이상으로 깊이 취기가 돌아 있었거나.
문득 곽가의 뇌리에 조금 전의, 묘하게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듯 단호했던 순욱의 태도가 떠올랐다.
최근 한두 주 동안은 어쩌다 보니 제대로 ― 물론 곽가의 기준에서이다 ― 술을 즐기지 못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 있다. 점령지의 증가로 내정 쪽 업무의 일부가 곽가에게까지 넘어온 탓에 짬을 만들기 힘들었고, 그 영향으로 조조도 다망해져서 사석에서 따로 술잔을 기울일 기회도 없었고, 하루이틀 정도는 늘어난 업무 탓인지 평소의 생활 태도 탓인지 건강을 해쳐 침상에 앓아눕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이유들의 첫번째 ― 업무과다가 어제 오후에서야 어느 정도 일단락이 난지라, 절대 본의가 아닌 절주 생활을 겨우 청산하고자 지난 승리 후 조조에게서 받은 고대하던 미주(美酒)를 드디어 꺼낸 참이었다.
그리고 반나절이 채 지나지 않아, 마침 딱 취기가 제대로 돌았을 때 순욱이 방문했다.
새삼 되새겨 보면, 최근 며칠간은 묘하게 이런저런 핑계로 사공부 소속이 아닌 문관들의 방문이 잦았다. 오늘도 이미 순욱을 제외하고 서너 명은 본 참이다. 전원을 다 기억하는 것은 아니나, 그중 적어도 한 명은 확실하게 익히 잘 아는 얼굴이었다. 마침 기분 좋게 술기운이 돌기 시작한 참이라 곽가는 웃으면서 잔을 권했고, 아마도 세 번째 손님이었던 그는 누구 부하 아니랄까 봐 난감함 반 떨떠름함 반으로 손사래를 쳤었다.
그 문관이 어디 소속이었는가는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우수한 모사에는 크게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불리를 천부의 재(才)로 뒤집어엎는 것을 즐기는 자.
다른 하나는, 이기는 것이 당연하도록 판을 짜는 자이다.
곽가는 뒤늦게 밀려들어 오는 쓴웃음과 함께 그만 박수를 치고 싶어졌다. 즉 자신은 상대가 자기 좋을 대로 짠 판에 자진해서 뛰어들어 버린 셈이다. 이제 와서 올라탄 호랑이에서 뛰어내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상황을 어떻게 뒤집으면 좋을까.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은 장고(長考)다. 마지막으로 잔을 입에 댄 지 그새 짧지는 않은 시간이 지났다. 수를 생각하는 척 가장하며 일부러 한 수에 들이는 시간을 미적미적 늘인다면 당연히 조금씩 취기는 깰 것이다.
하지만 가장 먼저 떠오른 이 수를 곽가는 이내 폐기했다. 반상 위의 승부에만 이기면 된다면 그것도 한 방법이 되겠지만, 이 승부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증명해야 하는 건 바둑 실력의 우위가 아니라 이 일의 발단이기도 한 제 입버릇의 정당함이다. 취기에서 도망치려 샛길로 들어서는 순간 패배 선언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 될 것이다. 역시 당초 생각했던 정공법대로, 끝내기까지 가기 전에 형(形)의 우세로 불계승을 얻어내야 한다.
곽가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달그락하고 소리가 났지만, 돌을 쥔 손가락은 꽤 오랫동안 돌통에서 나오지 않았다.
'정공법은 실패……인가. 아니, 하지만…….'
어느덧 온 바둑판으로 확대된 흑과 백의 교차를 보며 곽가는 턱을 괴었다. 순욱은 돌을 던지지 않았다. 큰 전투 몇 곳에서 이득을 본 덕에 흑의 우세는 아까보다 좀 더 강해졌다. 하지만 우세일 뿐 압도는 아니다. 끝내기에서 뒤집기에는 조금 큰 차이로 보이지만, 성가신 건 취한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취했는지를 절대로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끝내기는 세밀하고 정확한 계산이 생명이다. 지금의 자신이 그게 가능할 정도까지 술이 깨어 있는가? 곽가는 그걸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능하든 불가능하든 여기까지 온 이상에는 마지막까지 가보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내심과는 반대로 평온한 몇 수가 다시 지나갔다.
문득 순욱이 팔짱을 꼈다. 잠시의 침묵이 지난 후.
"오늘은 이 정도로 할까요."
"……그건 패배 선언일까?"
생각지 않은 순욱의 말에 곽가는 반상과 눈씨름하던 고개를 들었다. ―결과는 볼 것도 없다는 확신인가, 혹은 패배가 보이기 시작한 미래의 풍경을 얼버무리려는 방편일까.
"그렇다면 끝까지 두는 것도 괜찮겠지요."
순욱의 얼굴은 창밖에서 들이치기 시작한 역광 탓에 평소 이상으로 표정이 읽기 어려웠다. 곽가는 잠시 망설였다.
평범한 내기였다면 이기든 지든 끝까지 가 보았을 터이다. 하지만 이번 건은 이겨야 하는 게 아니라 지면 안 되는 승부였다. 그렇다면 답은 나와 있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밖은 이미 석양이 깔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이없음에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선 곽가를 보며 한발 늦게 순욱도 몸을 일으켰다.
"남은 업무가……."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물론 이 시간까지 아무도 순욱을 부르러 오지 않은 시점에서 퇴로를 끊기 위한 핑계였다는 건 뻔한 이야기다. 그걸 알면서도 모처럼 여유롭게 보낼 수 있었던 하루를 통째로 소모하게 한 것에 대한 작은 복수를 겸해 굳이 한마디 해 주려던 곽가의 말은 순욱의 예상치 못한 행동으로 도중에 끊기고 말았다.
"……뭘 하는 걸까……?"
아무 예고도 없이 느닷없이 손목을 움켜쥐더니, 이내 손으로 표적을 옮겨서는 진지한 얼굴로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이곳저곳 꾹꾹 눌러보기도 한다. 지압……? 치고는 전혀 두서가 없고. 의도를 알 수 없는 엉뚱한 행동에 잠시 말이 막힌 곽가였지만, 그 시간이 길어지자 초조함과 황당함에 자연히 말이 새었다. 순욱은 곽가의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이번에는 손을 바꿔 반대쪽 손을 똑같이 몇 번 눌러 보다가, 이내 덤덤한 얼굴로 손을 놓았다.
"품행의 불량에 대해 여러 경로로 보고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일단 표면적으로 특이사항은 없는 듯 보입니다만, 일상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정도로는 적당히 자중을 부탁드리고 싶군요."
"…….공적으로는 문제가 없다는 걸 방금 증명한 참이 아니었던가?"
"그렇습니다."
"……."
순욱은 차분한 얼굴로 자기 할 말을 하더니 이어 실례했다는 인사와 함께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도 곽가는 잠시 그대로 서 있었지만 이내 털썩 소리가 나도록 자리에 다시 걸터앉았다.
"어디까지 읽힌 걸까. 이것 참."
순욱이 쥐락펴락하던 오른손을 빙글빙글 돌리며 곽가가 문득 입을 열었다. 평소에는 다소 체온이 낮은 편인 그이지만, 방금 잡힌 손은 잡은 순욱의 손과 별 차이 없을 정도로는 온기가 돌고 있었다.
……좋은 술을 하사한 조조에게 감사해야 할까, 혹은 그 반대일까. 응, 역시 멋진 답례품을 지참해서 답례하러 가자. 아 오늘은 말고. 실내의 공기는 어느덧 기분 좋은 서늘함을 되찾고 있었다. 곽가는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곤 눈을 감으며 작게 웃었다.